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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관심거리/지식

[책요약]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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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
국내도서
저자 : 도란
출판 : 원앤원북스 20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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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도란

대학 졸업 후 4년간 기자로, 5년간 마케터로 정규직 생활을 했다. 언론사와 중견기업, 스타트업까지. 9년 동안 거쳐온 회사들은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영역이자 복잡한 피로감으로 뒤엉킨 공간이었다. 결국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이 턱밑까지 차올랐을 때, 모든 감정을 샅샅이 태워야 할 것 같은 회사생활에 이별을 고했다. 퇴사 후 신혼집의 거실 한편 책상에 자리를 잡고 기고를 하며 프리랜서 기자 겸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불안과 자유를 이불처럼 덮고 시작한 프리랜서 생활은 어느덧 5년 차. 한숨보다 웃음이 많은 프리랜서 생활을 즐기고 있다. 카카오 브런치에서귀리밥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며, 5회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반절의 주부로 은상을 수상했다. 에세이 여자 친구가 아닌 아내로 산다는 것을 썼다.

 

Short Summary

잡지사에 다닐 때였다. 메인으로 발행하는 잡지와 부수적으로 만드는 작은 신문이 있었는데, 신문은 품이 크게 안 들어서인지 디자인을 프리랜서 디자이너에게 맡겼다. 그 디자이너는 일주일에 한 번 아침 일찍 출근해 오후 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돌아갔다.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던 디자이너는 말수가 많지 않았다. 업무상 용건이 있으면 간간이 말을 주고받았고, 함께 점심식사를 할 때도 있었지만 역시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동료들이 인심이라도 쓰듯 회식에 초대하면 그녀는 점잖게 거절하고 귀가하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사람이니 손님 같기도, 같은 매체를 만든다는 입장 때문에 한 식구 같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동료와 상사들의 태도는 일관성이 없었다. 디자이너가 돌아가고 나면 항상 뒷말이 오고 갔으니 말이다. 당시 디자이너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짐작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디자이너의 얼굴은 늘 구김이 없었다. 뽀얀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얹고, 청바지에 늘 말끔한 셔츠를 입던 디자이너는 긴장이나 불편한 기색 없이 편편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를 하고 제 자리에 앉아 일을 했다. 정해진 시간에 함께 식사를 하고 업무를 마치면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정해진 업무를 온전히 마무리하는 게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일이었고, 그녀는 모자람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래전 사무실에서 마주치던 그 프리랜서 디자이너는 나의 지난한 회사생활과 닮은꼴을 앞서 경험했을지 모른다. 나는 이제야 그 디자이너의 편편한 얼굴을 이해한다. 남들이 뒤에서 뭐라 수군거리든 매일 보는 사람이 아니니 그만이고, 회식에 참석 안 한다고 해서 동료들과의 사이가 멀어질까 걱정할 필요 없고, 일을 마치고도 식은땀 흘리며 앉아 있는 충성야근도 프리랜서에겐 해당사항이 아니다. 근로형태 중 가장 말끔하고도 당당한 나의 프리랜서 생활을 이야기하게 된 이유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서 사표를 내고, 다음 선택이 다시 회사가 되었다면 나는 절대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회사의 다음 선택이 반드시 회사가 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얼굴이 모두 다르게 생겼듯, 사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회사 아닌 다른 길을 찾아도 내 삶은 망하지 않는다.

 

 

차례

 

CHAPTER 1 그렇게 프리랜서가 되었습니다

 나의 자유로운 날들: 어떻게 프리랜서가 됐냐고 물으신다면

 프리랜서의 일과가 궁금하다면: 아침 7시에 시작되는 보통의 하루

 일감은 어디서 구하냐고요?: 밥그릇을 채우는 네 가지 방법

 애 키우기 좋은 직업: 타의로 선택한 프리랜서의 의미

 마음껏 아프기: 우리는 마음껏 아플 자유가 있다

 퇴사, 그만 외치면 안 될까?: 회사가 프리패스가 아니었듯, 퇴사도 마냥 자유는 아니야

 

CHAPTER 2 프리랜서로 살아보니 괜찮습니다

 테이블이 필요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면 오로지 테이블

 인싸 되는 법: 자발적 아싸에서 은근한 인싸가 되어간다

 남편의 꿈: 프리랜서 아내를 지켜보는 남편의 속사정

 대중교통 내 자리: 가로세로 45cm면 충분하다

 건강해야 오래 쓴다: 프리랜서로 살기 위해 건강을 사수한다

 소중한 노동값: 임금 체불이 당연하면 안 된다는 사실

 정말 미안했습니다: 돌려받지 못한 돈보다 돌려받지 못한 신뢰가 아팠다

 오해는 금물: 엉뚱한 방어력으로 완성된 오늘의 나

 프리랜서 작가의 밥상: 밥만큼은 온전히 벌어서 먹고 싶다

 

CHAPTER 3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의 일

일단과 헤어지는 방법: ‘일단은 나를 한없이 고생시키고 성장시켰다

 당신의 가벼운 제의: 그 가벼움에 나는 떼기 쉬운 스티커가 되었다

 그래서 얼마면 돼?: 프리랜서 작가의 원고료

 작업복은 필수: 여정을 함께한 만큼 낡아가는 것들

 아마도 장비발: 회사 돈이 아닌 내 돈으로 마련하는 장비들

 수정은 이제 그만: 수정 요청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비수기와 성수기: 일이 적을 때와 많을 때

 초보 강사 도전기: 프리랜서의 겸직은 무제한

 이별을 고해야 할 때: 좋은 이별은 다른 이름으로 돌아온다

 

CHAPTER 4 프리랜서라서 누리는 따뜻한 하루

 사실은 따뜻했던 그녀: 얼음장 같았던 인간관계에도 꽃은 핀다

 두 번의 식사대접: 한술 밥에 감동이 최고의 반찬

 그들의 언어영역: 소통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슬펐던 그날

 돌고래 박사님: 고무바지와 보트가 인상적이었던 그날의 인터뷰

 여행처럼 일을 떠났다: 행복의 복판에 있었던 단 한 번의 경험

 헬로 마이 워너비: 이런 게 성덕의 기쁨일까?

엄마를 배운다: 그들의 모성이 가르쳐준 것

 작가들의 만남: 한 번씩 소속감이 필요할 때

 

 나오며_내 삶의 성적표를 받았다

CHAPTER 1 그렇게 프리랜서가 되었습니다

 



나의 자유로운 날들 - 어떻게 프리랜서가 됐냐고 물으신다면

대학 졸업 후 기자로 일하며 취재와 기사 작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지냈다. 그래도 좋았다. 워낙 하고 싶은 일이었고, 오래도록 동경했던 언론계에 내 자리와 명함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나를 비롯한 기자들에겐 취재 경험과 기사가 재산이었다. 이 재산은 당장 입금되지는 않아도 가슴속에 켜켜이 쌓이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 시절은 종이신문과 온라인 뉴스 사이에서 종이 신문을 유지하느냐 마느냐로 대세와 실랑이하던 때였다.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내가 다니던 신문사는 월급이 밀렸다. 한 달에 십만 원, 이십만 원씩 쪼개가며 돈을 입금하더니 퇴사할 무렵엔 이미 몇백의 급여가 밀린 상태였다. 다른 언론사로 이직을 고려했지만 귀동냥으로 들은 소식에 따르면 힘들기는 다른 언론사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그토록 좋아하던 언론사 생활을 털고 다른 세계로 넘어왔다.

 

새로 취직한 곳은 프랜차이즈 기업의 마케팅팀이었다. 마케팅의 ‘마’ 자도 모르는 나였지만 기자 경력과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운 좋게 취직되었다. 주로 언론홍보를 담당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했다. 업무는 조금씩 늘었고, 나중에는 일하는 시간만큼 공부도 해가며 마케터로 성장해갔다. 그런데 마케팅을 해본 이들이라면 알 것이다. 새로 나오는 매체와 홍보방식은 차고 넘치는데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매번 숫자로 매겨지는 실적을 내기 위해 마케터들이 얼마나 피가 말라가는지. 이렇게 9년간 쌓여가는 회사생활에서 종종 의문이 일었다. ‘만약 내가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회사라는 틀을 빼고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정말 회사라는 도착지가 필수였을까?’

 

프리랜서로 전환한 계기는 마케터로 일한 지 5년 차에 들어선 무렵이었다. 매일같이 하는 야근과 그놈의 라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직을 염두에 둔 곳은 인지도가 높고 규모가 큰 기업이었다. 집에서 좀 멀긴 했어도 근무환경이 상당히 좋은 곳이었다. 북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사무실 풍경, 언제든 질 좋은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는 카페테리아, 현 직장에 비해 높은 연봉, 면접 시 마주친 이들의 고급스러운 차림새와 행동거지, 하나같이 다 마음에 드는 구석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구석들 사이에서 흐릿하게 의문을 품었다. ‘이직만 하면 즐겁게 살 수 있을까?’ 현재 다니는 회사가 문제인 건지, 내가 회사생활을 버티듯 다니고 있는 게 문제인 건지 헷갈렸다. 저녁 6시가 되면 당연한 퇴근시간인데도 눈치를 보며 겨우 가방을 싸는 생활이 다시 이어지는 게 나를 즐겁게 할까? 일단 이직만 한다면 나는 더 많은 돈을 모으고, 더 멋진 일을 하며, 후배들로부터 존경받는 상사가 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나는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었다.

 

그 멋진 회사는 면접에서 나를 통과시켰다. 얼마 후 합격을 통보하는 전화가 왔다. 하지만 나는 입사를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차마 ‘회사 자체를 다니지 않겠다’라는 포부를 말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엉뚱한 거짓말로 답을 하고 말았다. “지금 회사에 남기로 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저보다 좋은 직원 만나시길 바랄게요.”

그러고 나서 며칠 뒤 나는 다니던 회사에서 짐을 쌌다. 그때 내 나이 서른넷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퇴사를 말렸지만, 나는 기어코 회사라는 구조에서 빠져나와 자유로운 노동자 신분으로 옮겨왔다. 물론 프리랜서를 시작한다는 건 아주 즐겁고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선언’을 할 무렵은 불면증과 초조함으로 늘 긴장된 상태였다. ‘나를 찾는 곳이 없으면 어쩌나’, ‘애매한 나이에 일을 그만뒀으니 재취직을 하고 싶어도 못 하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상상이 나를 떨게 했다. 하지만 여러 번 생각해봐도 고통스러운 회사생활과 이직을 앞두고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 예상한다. 그렇게 불안한 시간을 잠시 견디고 나니 프리랜서로 일하는 매순간이 내게는 꼭 맞는 편안함이었다.

 

프리랜서 생활은 올해로 5년째다. 보통 공공기관이나 기업, NGO 등의 일을 맡아 하는데,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형식에 맞춰 글을 쓰는 일이라 작가로 불리기도, 취재가 빈번하게 진행되니 기자로 불리기도 한다. 적게는 두세 군데, 많게는 다섯 군데 정도의 클라이언트와 일을 진행한다. 단기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프로젝트를 마치고도 일을 쉬지 않기 위해 더 많은 곳에서 일감을 받는다. 대응해야 할 클라이언트가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다.

 

나는 이제 일한 만큼 오롯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좋고 나쁜 점이야 어느 직업이나 수두룩하니 회사생활과 프리랜서 생활의 경중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지금 ‘회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고, 가슴속에 뜨거운 두부가 얹혀 있는 기분이 든다면 회사라는 네모 밖을 상상해보는 게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다. 이 시대를 사는 방식이 오로지 ‘회사원’ 하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기만 해도 우리는 꽤 괜찮게 살 수 있다.

 

일감은 어디서 구하냐고요? - 밥그릇을 채우는 네 가지 방법

일자리, 일감을 흔히 밥그릇이라고들 말한다. 직장인에게 직장에서의 제 자리가 밥그릇이라면 프리랜서에게 밥그릇은 일감이 아닐까? 직장인이 조직에서 자신의 책상 한 자리와 직함, 업무 영역을 보유하듯 프리랜서도 자신의 일감을 사수해야 한다. 프리랜서는 어떻게 일감을 구할까?

 

내 경험상 프리랜서로 일감을 구하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묶을 수 있다. 일단 보통의 직장인이 이직할 때와 마찬가지로 구직사이트에서 찾는다. 구직사이트에 접속해보면 고용형태에 당당히 ‘프리랜서’라는 항목이 있다. 프리랜서로 구인하는 경우는 정규직을 고용할 만큼 업무량이 꾸준하지 않지만 내부 인력으로 해결이 안 되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구하는 케이스다. 혹은 업무 특성상 굳이 사무실에 모여 일하지 않아도 될 경우 고용과 정리가 유연한 프리랜서를 선호하기도 한다.

 

구직사이트를 통해 일감을 구하는 경우는 프리랜서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갓 독립한 사람이 능숙한 세일즈맨처럼 영업을 할 것도 아니고, 적어도 기업이라는 믿음직한 형태의 조직으로부터 일감을 받고 싶으니 구직사이트를 찾을 수밖에 없다. 나는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고 2년 정도 진행한 일감의 대부분을 구직사이트에서 찾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예상하는 일감의 루트는 지인의 소개다. 소개로 일감을 받는 경우는 있지만 그 수가 그리 많지 않다. 내 경우 정규직에서 프리랜서로 전환할 때 딱 한 번 소개로 일감을 받은 적이 있다. 남편의 친구가 운영하는 외식 브랜드의 SNS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남편의 친구다 보니 대하는 게 조심스럽기도 하고, 혹여나 업무적으로 갈등하느라 중간에서 남편과 친구의 사이까지 흐리게 될까 걱정이 많았다. 다행히 남편의 친구는 공과 사를 잘 구별하는 사람이었고, 업무적으로 부딪힌 적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이가 좋고 원활하게 일한다 한들 누군가의 소개로 일을 한다는 건 신경 써야 할 부분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다.

 

내 생각에 가장 이상적인 일감의 의뢰는 함께 일했던 클라이언트로부터 다시 제안을 받는 경우다. 함께 일하며 이미 서로를 겪어봤으니 두 번씩 맞춰가며 간을 볼 필요가 없다. 고료 수준이나 결제방식도 다 알고 있으니 걱정도 덜하다. 한 번 일해보고 두 번째를 제안한다는 건 클라이언트가 그만큼 나를 신뢰한다는 뜻이니 몹시 감사한 일이고, 나의 업무방식을 크게 수정하지 않아도 되어서 안심이다. 클라이언트가 어떤 콘텐츠와 업무방식을 선호하는지 알고 있으니 그에 맞춰 일을 진행하고 마음 편히 고료를 받으면 된다. 또 두 번, 세 번씩 함께 일하는 동안 더 좋은 작업 결과를 전달하고 계약된 프리랜서로서 좋은 아이디어나 기획까지 제안한다면 튼튼하고 견고한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에이전시를 통해 일감을 얻기도 한다. 내가 에이전시를 통해 일감을 받은 건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작가와 클라이언트를 연결해주는 에이전시에 포트폴리오를 등록한 뒤 종종 일감을 소개받고 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다시 질문이 따라온다. “에이전시는 얼마나 떼어가나요?” 이 질문에 대한 답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그런 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해요.” 나라는 사람의 포트폴리오와 경력을 보고 클라이언트에게 소개하고 일감을 전해주는 에이전시다. 클라이언트가 제시한 고료에서 얼마간의 수수료를 떼어간들 그걸 아까워하고 흥정이라도 하려 든다면 에이전시와 일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나를 믿고 소개하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가져야 옳은 태도다. 얼마를 떼어갈지 궁금해 하고 전전긍긍하느니 그들을 믿고 함께 일하는 동료라고 생각해야 그 관계가 유연해진다.

 

보통 이런 방식으로 일감을 얻는다. 하지만 프리랜서가 일감을 사수하는 왕도는 없다. 일감을 구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이고 내가 아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누군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도 있겠다.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도 프리랜서의 길을 가고 싶다면 못 할 것도 없다. 일감을 확신할 수 없는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해볼 만한 마음이 든다면 지금 당장 오라. ‘각자도생’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Chapter 2 프리랜서로 살아보니 괜찮습니다

 

인싸 되는 법 - 자발적 아싸에서 은근한 인싸가 되어간다

인싸(인사이더의 줄임말)와 아싸(아웃사이더의 줄임말), 그중 나는 자발적 아싸에 가까운 사람이다. 사교성이 스펙처럼 통용되는 요즘, 아무래도 인싸형 인간일수록 어디서나 인기를 끌고 취직이든 업무든 유리하게 풀어가기 쉽다. 하지만 세상 모두가 쾌활하게 사교적이지 않다는 불변의 진리에 따라, 나는 아싸형 인간이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나름의 사정을 털어놓으려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재수를 거쳐 대학에 입학했는데, 이때부터는 자발적 아싸에 속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소위 말하는 ‘캠퍼스 생활’보다 학점과 생활비가 중요했기 때문에 동기나 선배들과의 자리를 적당히 조절해가며 적정선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정도였다. 집에서 학비와 용돈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여가생활을 보내는 동기들과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도 큰 요인이었다. 언젠가 같은 동기지만 한 살 아래였던 동생이 내게 했던 질문이 기억난다. “언니는 왜 자꾸 아르바이트를 해요?” 동갑내기에게는 이런 말도 들었다. “네가 자꾸 아르바이트한다고 일찍 가니까 친해질 수가 없어.” 내가 지금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고 생활하려면 아르바이트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지만, 그날의 이질감은 졸업할 때까지 아싸로 살 수 있는 든든한 에너지가 되었다.

 

이런 자발적 아싸 성향은 회사에 다닐 때도 이어졌다. 회사생활을 하면 다시 층위가 나뉜다. 직급ㆍ부서 관계없이 웃으며 말을 섞고 회식에서 온몸을 불살라 인기몰이를 하는 인싸, 용건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아싸, 모두와 잘 지내진 않지만 적당히 웃어가며 싫은 티를 내지 않는 중간 단계. 회사를 그만두면서 역할극은 그나마 정리되었지만 결국 프리랜서도 사회에 속하기는 마찬가지다. 직장 내에서 서열과 사내 분위기에 맞춰 성격을 관리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클라이언트를 대할 때, 업무상 담당자와 교류할 때, 나처럼 인터뷰와 취재가 빈번한 직업인 경우 낯선 이와의 대면에서 적당한 페르소나를 갖춰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아싸의 기질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면 클라이언트가 나를 다시 찾는 일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래서 인터뷰를 나가거나, 새로운 클라이언트를 만나거나, 취재를 함께 가는 낯선 동행이 있을 땐 내가 가진 가장 말끔한 페르소나를 꺼내 얼굴에 씌운다. ‘오늘의 나는 밝고 쾌활해. 구김 없이 예쁘게 자란 어른이야. 그러니까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어. 오늘 나는 다정할 거야.’ 이런 다짐을 입 안에서 곱씹으며 현장으로 향한다. 인터뷰 자리에서는 더없이 자주 웃는 얼굴을 보여서인지 그 덕에 인터뷰이들은 나를 따라 곧잘 웃는다. 젊은 사람이 싹싹하다며 칭찬하는 어르신들이 많고, 딱딱한 표정으로 시작했지만 속내를 스스럼없이 꺼내는 진솔한 인터뷰로 마무리되는 날도 많다. 업무 담당자들과는 처음엔 적당한 페르소나로 편안하게 지내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짜 내 모습으로 조우한다.

 

하루 종일 페르소나를 쓰고 있다가 집에 도착하면 쓰고 있던 페르소나를 마음속에 주섬주섬 챙겨 넣지만 이렇게 애쓰는 가운데 내가 은근한 인싸가 되어간다고 느낀다. 오늘 하루 구김 없던 내가 좋았다면, 수줍은 나는 잠시 잊고 상대방과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렸다면, 그토록 바랐던 페르소나가 이미 내가 된 게 아닐까? 혼자 감내하는 게 익숙했던 삶에서 은근한 인싸로 변해간다고 느끼는 요즘, 사람들 주변에 겉돌던 나는 프리랜서로 살며 보다 단단해지고 있다. 단단해진 만큼 자연스럽게 인싸가 되어가고 있다. 굳이 페르소나를 꺼내지 않아도 웃을 수 있고, 진심으로 즐거운 인터뷰와 대화를 소유하는 현재는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인싸의 길이다.

 

프리랜서 작가의 밥상 - 밥만큼은 온전히 벌어서 먹고 싶다

“글 써서 밥 먹고 삽니다.” 이 소개말은 들쭉날쭉한 수입과 자유로운 생활의 간극을 건강하게 버티게끔 하는 원동력이다. 어릴 적부터 제일 잘 하는 것, 그나마 ‘특기’란에 하나 적을 수 있었던 ‘글짓기’라는 단어가 몸서리치게 고마웠던 언젠가부터 시작된 이 자부심. 자음과 모음의 합을 이용해 쓴 무형의 것들이 실용적으로 쓰인다는 사실은 땅 위의 나를 단단하게 버티게 해준다.

 

내가 잡지사에 합격해 기자생활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믿지 않았다. 월급을 받아오고 나서야 기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4년간 기자생활 후 잠시 다른 직군으로 외도를 하고 다시 프리랜서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도 친정 식구들은 믿지 않았다. 이렇게 프리랜서 작가는 가족부터 주변 사람들까지 쉽게 보지 않는 직업이다. 어쩌다 전업 작가나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들과 대화해도 마찬가지다. 누구 하나 글 써서 밥 먹고 사는 게 쉽지 않다. 글을 그저 생각한 대로 술술 나오는 게 아니라 공부도 하고 취재도 해서 머리와 마음에 뭔가 그득히 채워야 나온다. 엄청난 노동력이 집약된 일이다. 그럼에도 아주 유명한 작가가 아닌 이상 나를 비롯한 작가들은 언제든 적은 고료에 달달거리고, 어처구니없는 누군가의 무례함을 삭혀야 하고, 글쓰기 외의 부업으로 끼니를 챙겨야 한다.

 

이런 이유로 가끔 의기소침해지지만 대부분의 날들에 나는 ‘밥’을 잘 챙겨 먹기로 했다. 밥 벌어 먹기 힘든 직업인데, 밥마저 제대로 못 먹으면 내가 너무 불쌍해질 것 같아서였다. 수입이 들쭉날쭉하다며 개다리소반에 밥과 간장 종지만 올려 놓고 먹을 게 아닌 이상 끼니를 잘 챙겨서라도 자부심에 영양분을 줘야 한다. 이럴 땐 ‘밥만큼은 잘 먹어야지’ 하고 벼르는 마음과 ‘밥이라도 잘 해 먹어야지’ 하며 의기소침해지는 나를 위로하는 마음이 번갈아 든다.

 

그렇게 차리는 1인분의 밥상은 소박하지만 부실하지 않게 준비하려 애쓴다. 간단하게나마 내 욕구를 충분히 채워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저녁식사는 남편과 하는 것이니 최대한 남편에게 맞춰 준비하고, 점심식사는 오로지 내가 먹고 싶은 것으로 궁리해 요리한다. 그렇다고 점심을 늘 혼자서만 먹진 않는다. 가끔 친구를 만나서 점심을 함께 먹거나, 화요일의 독서모임 후 다 같이 식사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꼭 내 용돈으로 밥을 사 먹는다. 최소한 점심식사만큼은 꼭 내가 벌어 먹고 싶어서인지, 생활비로 나만의 점심 밥값을 내기가 싫다. 격주로 모이는 독서모임에서 사람들과 밥 먹으러 갈 때마다 내 앞에 놓인 음식을 보며 속으로, ‘오, 내가 벌어먹는 밥이로구나’ 하며 기뻐한다.

 

벌어먹는 밥이 고마워서일까. 이렇게 쓰는 행위로 나를 연명한다는 감사함과 저릿함 때문일까. 매일 나를 위한 밥상을 차리며 만감이 교차한다. 먹고 나면 또 열심히 쓰고 일한다. 해질녘까지 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글 써서 밥 먹고 산다. 열심히 벌어먹고 있다.

 

Chapter 3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의 일

 

‘일단’과 헤어지는 방법 - ‘일단’은 나를 한없이 고생시키고 성장시켰다

“일단 해보겠습니다!” 나의 단골멘트다. 해본 적이 없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일, 혹은 어려움이 뻔히 보이는 일이라도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 탓에 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일단 해보겠다니, 얼마나 무모한가.

 

그런 내가 제대로 ‘일단’에 휘말린 어느 겨울의 일이다. 한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모바일 매거진을 기획하고 있는데 혹시 기사 작성을 맡아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글 쓰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또 마침 한 업체와의 계약이 만료되어 새로운 클라이언트와의 일을 찾던 중이었다. 이메일로 기획안을 받았다.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단어로 채워진 기획안을 읽고 있을 때 다시 전화가 왔다. “기획안만 보면 어렵죠? 무슨 말인지 감도 안 오고…. 일단 만나서 설명드릴게요. 사무실에서 봅시다!”

 

알겠다고 하고 약속시간을 정한 뒤 다음 날 출판사로 찾아갔다. 다들 퇴근하고 저녁이나 먹으러 나갈 무렵의 시간이었는데, 작은 출판사의 사장님이 혼자 컴퓨터 앞에서 끙끙거리며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출판사 사장님은 상당히 업무가 많은 사람이었다. 얼추 일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잠시 기다린 다음 기획안을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설명을 들어보니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매거진이었다. 관련 지식이라곤 한 톨도 없는 내가 감히 시도했다간 망신당하기 딱 좋은 일이었다. “이 일을 맡기엔 제가 많이 모자라네요.” “괜찮습니다. 다 알아가면서 하는 거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글을 쓰면 독자들도 실망할 텐데요.” “아닙니다. 에디터님만 괜찮다면 저는 맡기고 싶은데요. 제가 요즘 사람 구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요. 글 쓰는 분들 섭외하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저는 괜찮으니 같이 일해보시죠. 자료는 저도 같이 찾겠습니다.” “아니, 그게….”

 

이런 식의 대화를 두어 번 반복하며 도통 거절을 못하는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이윽고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오고야 말았다. “일단 해볼게요.” 다시 ‘일단’에게 발목을 잡혔다. 식은땀이 흐르는 등 뒤에서는 ‘일단’이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소주 한 사발 들이켠 것 같은 쓴맛이 목으로 넘어갔다.

이 일은 ‘일단’에게 호되게 당한 대표사례가 되었다. 관련 지식이 전혀 없던 나는 이 매거진의 기사를 쓰기 위해 엄청난 공부가 필요했다. 한 편의 원고를 쓰기 위해 책 한 권씩을 읽어야 했고, 모르는 용어가 수두룩해서 짧은 원고 하나를 쓰는 데도 하루가 꼬박 걸렸다. 원고마다 감정 소비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계약서에 도장은 찍었고, 분야가 분야다 보니 새로운 에디터 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알게 모르게 사명감도 생겼다. 필요한 인터뷰 상대가 있으면 핸드폰이 뜨거워지도록 전화를 붙잡는 것도 내 몫이었다. 나는 ‘일단’을 쉽게 사용한 죗값을 톡톡히 치렀다.

 

그렇게 매거진에 글을 쓴 지 9달째 되던 날, 언제나 바쁜 사장님과 대화를 나눴다. 다가오는 연말에 매거진 서비스가 종료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혹시 서비스 종료라는 안 좋은 결말을 맞더라도 충격이 덜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매거진은 사장님이 어떤 기업으로부터 외주를 받아 진행하는 건이었는데, 수익이 별로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장님과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니 킬킬거리던 ‘일단’이 훌쩍이는 모습이 보였다. ‘일단’을 던지는 바람에 그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왔고, 업무가 종료되면 여유가 생길 줄 알았건만 이 난데없는 훌쩍임이라니. 그래서 사람들이 ‘시원섭섭’이란 표현을 쓰는 걸까? 자료 조사와 낯선 분야를 캐는 고생을 덜 수 있다 생각하니 시원했지만, 열심히 만든 매체와 이별하는 건 섭섭했다. 몹쓸 ‘일단’ 때문에 끌어온 일인데 섭섭함을 느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편으로는 ‘일단’ 덕에 무모한 일도 덥석 베어 물고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걸까 싶기도 했다.

 

연말에 매거진을 마무리하며 애증의 ‘일단’과 헤어지기로 다짐했다. 물론 장담할 수 있는 다짐은 아니다. 훌쩍이던 ‘일단’을 보니 나를 구축해오던 패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짐작이 가니 말이다. 일단 해보겠다는 자신감과 호기가 있었기에 5년째 프리랜서 생활을 잘 이어온 게 아닐까. 또 앞으로도 성장하기 위해 종종 ‘일단’에게 패를 넘겨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단’의 뒷면에는 적극적으로 일감을 얻지 못해 발만 동동거리다 정규직 채용 공고를 서성였을 어떤 순간이 떠올랐으므로.

 

비수기와 성수기 - 일이 적을 때와 많을 때

내 경우 비수기는 짧으면 1주 정도, 길면 2주 정도 찾아온다. 몇 년간 이 생활을 해왔지만 여전히 그 틈에는 불안과 걱정이 깃든다. 또 이 시기에는 불안한 나머지 자꾸 좋지 못한 결정을 하게 된다. 마음이 급해져서 내 조건과 성향에 맞지 않는 제안을 덥석 물고는 내내 고생하다 프로젝트가 끝나는 순간 날아갈 듯 기뻐하는 일이 벌어진다. 몇 번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이제는 나와 맞지 않는 일을 보는 안목이 생겼고, 괜한 흥정으로 서로의 감정이 상하기 전에 웃으며 거절하는 습관도 들었다.

 

불안과 안도가 수없이 반복되는 생활에서 이제는 일감이 뜸한 찰나를 만나면 모처럼의 휴가를 보낸다. 평일에는 거리가 먼 미술관을 가거나 한동안 얼굴을 못 본 친구들과 식사 약속을 잡는다. 고향인 인천은 왕복 4시간의 거리라서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짧은 여행길에 오르는 것도 이 무렵에 시도한다. 손을 움직여 무언가 만드는 취미생활로 소소한 보람을 느끼고, 싱크대와 베란다 구석구석 먼지를 닦아가며 밀린 청소도 한다. 그렇게 평소와 다른 공기를 마시고 있노라면 얼마 안 되어 함께 일하자는 누군가의 노크가 들린다. 불안과 걱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진 않았지만 몇 해 전과 비교해보면 비수기에 대처하는 마음이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

 

반대로 일이 몰리는 ‘성수기’에는 번아웃을 예방하기 위한 단단함도 필요하다. 일이 끊길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제안이 들어오는 족족 받아들이는 때가 있다. 일을 쉰 기간을 경험했거나 프리랜서 생활 초반이라면 누구나 그럴 만하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며 무조건 ‘예스’를 남발하다 보면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일정에 눌려 컨디션과 업무 수준 둘 다 떨어지기 십상이다.

겨울이 시작되던 재작년 11월 무렵의 내가 그랬다. 당시 1년 가까이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총 3개였다. 11월은 공공기관이나 공기업들이 한 해 동안 있었던 성과를 사례집이나 기록으로 남기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시기다. 기존에 지속하던 프로젝트 3개에 새로 들어온 공공기관의 사례집 2개까지 총 5개를 맡게 되었다. 프로젝트 내용이 마음에 들어 해보고 싶기도 했고, 고료도 괜찮았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추가된 업무까지 듬뿍 받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해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받은 업무량에 잠을 줄여가며 일을 해치웠다. 평일에는 인터뷰와 취재에 집중하고,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글을 쓰고 주말에는 내내 원고 마감을 했다. 하루에 4시간 정도 자면서 일을 하며 연말을 보냈고 1월 말까지 바쁜 일정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남편에게 짜증을 내는 일이 빈번해졌고, 레토르트식품을 자주 먹었고, 독감까지 걸렸다. 전화는 매일 쉴 새 없이 울려대고, 확인하고 회신할 메일은 언제나 쌓여 있었다. 이때 정신없는 나머지 실수라도 할까 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때의 나는 탈진한 고슴도치와 같았다. 고된 시간을 지나고 나니 이렇게 치열하고 싶어서 선택한 프리랜서 생활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다. 남편과 건강하게 저녁밥을 지어 먹고, 아플 땐 푹 쉬고, 어쩌다 훌쩍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는 나들이에 설레던 프리랜서 생활에 일 욕심을 더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렇게 프리랜서로 사는 내내 비수기와 성수기는 수없이 교차한다. 이 삶은 늘 계획대로 흐르지 않고 예상치 못한 곳으로 가지를 숱하게 뻗어가기에 풍성한 나무로 자란다. 풍성할수록 비수기의 혹독함에 덜 흔들리고, 성수기의 고단함에 쉬어갈 수 있다. 이렇게 마음먹기까지 5년이 걸렸지만 여전히 흔들거리는 나는, 프리랜서로 사는 평생 풍성하게 자라기 위해 무던히 애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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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프리랜서라서 누리는 따뜻한 하루

 

헬로 마이 워너비 - 이런 게 성덕의 기쁨일까?

낯선 사람과 심도 있는 대화를 끌어내고 글로 옮기는 기자라는 직업은 평소 인맥으로 닿을 수 없는 누군가와 만남의 장을 성사시켜주기도 한다. 가끔 ‘성덕’이라 말하는 ‘성공한 덕후’로 살고 싶은 마음도 기자와 작가라면 꿈꿔볼 만하다. 하지만 내가 맡은 취재영역은 문화부나 연예부와 거리가 멀어 드라마틱한 성덕의 길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우연히 성덕의 언저리까지 올라가본 적이 있다.

 

정부 산하 기관의 사례집을 맡아 우수사례로 선정된 IT기업들을 인터뷰할 때였다. 인터뷰이 목록을 받아 읽어보고 있는데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다. ‘설마, 동명이인이겠지?’ 그 이름은 내가 오래전 좋아했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J였다. J의 곡은 물방울이 건반을 치듯 영롱한 연주가 매력적이었다. 그 아름다운 음색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J의 연주를 좋아했고, 그중 가사를 붙여 발표한 곡도 즐겨 들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의 신보는 보이지 않았다. 새 음반을 준비하는가 싶었는데 내내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한때 몹시 좋아했던, 지금 들어도 몹시 좋은’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둔 채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그 J의 이름을 여기서 발견한 것이다. 꽁꽁 숨어 있던 아티스트가 “실은 나 여기 있었다!”라며 기지개를 켜듯. 그 이름을 발견한 뒤 인터뷰이 목록을 한참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알던 뮤지션이 IT기업을 이끌어간다는 연결고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을 해보니 몇 가지 인터뷰 기사와 사업성과를 알리는 기사에 J의 이름이 있었다. 음반이 나오지 않았던 몇 년간 그는 스타트업 회사에 입사해 기획과 알고리즘 개발을 담당했고, 이후 창업해 음악 콘텐츠를 제공하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니 IT업계에서 성과를 거두기까지 녹록치 않은 과정을 밟아왔고, 클래식 아티스트로 활동한 이력이 그 과정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신보가 보이지 않았던 그 몇 년간 J가 헛되이 살지 않았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흐뭇함이 감돌았다. 인터뷰에 앞서 검색을 좀 더 자세히 하며 J가 운영하는 기업의 소식을 수집했다. 인터뷰이가 누구든 가장 최신 동향까지 충분히 살피고, 업계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사전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래야 현장에서 추가 질문을 덧붙여가며 인터뷰 내용을 알차게 꾸릴 수 있다.

 

기다리던 인터뷰 날,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노트북을 세팅하고 J를 기다렸다. 단정한 모습과 약속을 잘 지키는 것으로 팬심을 다하고 싶었다. 잠시 후 J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전 내가 동경했던 아티스트를 기자와 인터뷰이 입장으로 만나는 뜻깊은 순간이었다. 나는 평소 인터뷰 전에 5~10분 정도 인터뷰 외 이야기를 하면서 긴장을 풀고 친밀감을 형성하는 편인데, 이날은 사심을 가득 담아 말을 건넸다. “실은 제가 J대표님 팬이었다. OO음반부터 엄청 좋아했거든요.” 이 말을 꺼내자마자 바짝 오그라들었던 긴장이 활개를 쳤다. 이 한마디를 꺼내고 싶어서 오늘 아침부터 얼마나 마음의 준비를 했던가! 내 말을 들은 J 역시 놀람과 반가움을 즉시 드러냈다. “와, 정말요? 아직도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이 계시다니 놀라운데요? 미리 말씀하셨으면 CD라도 챙겨왔을 텐데 아쉽네요.”

 

CD가 없으면 어떠랴, 그저 시원하게 팬심을 지른 것만으로도 감격인 것을. 나는 좋아하는 J의 음악을 몇 곡 고백했고, 새 음반이 나오지 않아 궁금했던 시절의 감정도 털어놓았다. 그에 대한 답으로 J에게 뮤지션에서 사업가로 전환하기까지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짐작건대 이날의 인터뷰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모두 즐겁고 편안했을 것이다. 나는 팬심과 선망, 새 출발에 성공한 오래전 워너비를 재회한 즐거움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이는 자신에게 긍정적인 시선을 가진 인터뷰어를 만나 훈훈하게 대화를 시작했으니 긴장을 풀고 진솔한 답변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 발목에 작은 모터가 달려 있는 것처럼 걸음이 둥실거렸다. 집에 돌아와서는 정말 오랜만에 일기를 썼고 다시 한번 J의 영롱한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연말에는 J에게서 안부 메시지도 받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성덕이 맞는 것 같다. 한때 나의 귓가를 독차지하고, 일상을 영롱하게 만들었던 아름다운 작곡가와의 잊을 수 없는 만남. 헬로 마이 워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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