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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관심거리/지식

책요약 : 끈기보다 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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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기보다 끊기
유영만 지음
문예춘추사 / 2023년 6월 / 318쪽 / 16,800원

▣ 저자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수. 불현듯 다가오는 뜻밖의 질문이 던지는 낯선 마주침으로 색다른 깨우침을 얻는 배움을 사랑한다. 정답을 찾아내는 능력으로 사람을 재단하고 평가하기보다 전두엽을 낯설게 자극하는 충격적인 질문과 비판적 문제 제기를 즐기는 탐구과정에 언제나 몸을 던지며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을 잉태하는 지식생태(生態)학자다. 《언어를 디자인하라》, 《폼 잡지 말고 플랫폼 잡아라》, 《부자의 1원칙, 몸에 투자하라》,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 《공부는 망치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지도》, 《곡선으로 승부하라》 등 저서와 《하던 대로나 잘 하라고》, 《빙산이 녹고 있다고》 등 역서를 포함해서 총 90여 권의 저  역서를 출간했으며, 다양한 사유를 실험하고 또 읽으면서 쓰고 강연하는 지적 탈주를 거듭하고 있다.

▣ Short Summary
위기의 시대, 지금은 내려가는 길이다. 지금껏 모두가 오르는 연습에만 열중해왔기에 내려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낯설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영민한 자들에게는 역전의 찬스이기도 하다.

경제 빙하기는 봄이나 여름은 짧고, 겨울이 생각보다 길며, 가을도 왔는지도 모르게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기다.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끼는 건 그만큼 마음에 흐르는 온기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생각과 지식, 그리고 경험적 교훈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기가 바로 경제 빙하기다. 버리고 내려가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기다. 이런 때일수록 타성에 젖은 언어를 버리고 날 선 언어로 낯선 생각을 잉태할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경제 빙하기라는 얼어붙은 분위기에 불안한 감정으로 짓눌려 살지 말고, 이런 때일수록 위기 이후를 상상하면서, 위기가 지나고 난 이후의 기회를 어떻게 포착할지를 절치부심하며 안목과 식견을 연마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불확실한 세상일수록 기존 지식과 경험적 지혜로 난국을 돌파하기는 어렵다. 불안감에 휩싸인 분위기에서 걱정하고 한탄을 반복할수록 한심해질 뿐이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의 상황을 공부하는 분위기로 바꿔야 한다.

지금 왜 ‘끈기’가 아닌 ‘끊기’가 필요한지를 역설하는 이 책은 그야말로 독자들의 내일을 새롭게 밝혀주는 뜨겁고 열렬한 빛과도 같다. 모든 터널에는 끝이 있다는 믿음, 모든 눈은 반드시 녹고 모든 비는 반드시 그친다는 믿음, 그리고 누군가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믿음, 그것이 우리의 힘든 오늘을 살게 만드는 희망의 파수꾼들이다. 그렇기에 그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이 책은 지친 우리들의 오늘을 희망으로 꽉 채워줄 것이다. 

▣ 차례 
prologue 구겨진 종이비행기가 멀리 날아가는 까닭은? 

1부 지금은 경제 빙하기 시대
봄은 안 올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울타리를 믿지 마라
▲ 끊어내기 전에 점검해야 할 것들

2부 당신에게 절실한 ‘끊는 연습’
바로 지금 항복을 선언하라
내려가지 않으면 죽는다
프로처럼 단순하고 부드럽게
곰처럼 자연스럽게
목표에 목숨걸다 목숨이 끊어진다
추울수록 밥에 투자하라
천천히 서둘러라
요구에 호소하지 말고 욕망의 물줄기를 찾아라
▲ 끊어내기 전에 시작해야 할 것들 

3부 낮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자
항상 최악을 상상하라
마음의 불씨를 지펴라
빙하기는 역전 찬스다
▲ 끊어내면서도 간직해야 할 것들
▲ 끊어내는 연습 

epilogue 지금은 희망의 종류를 바꾸는 용기가 필요하다

 

 


 
끈기보다 끊기
유영만 지음
문예춘추사 / 2023년 6월 / 318쪽 / 16,800원

1부 지금은 경제 빙하기 시대

봄은 안 올지도 모른다
“조금만 지나면 좋아질 거야.” 은행원 이 씨는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위기는 언젠가 진정될 것이고, 모든 게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사람들이 자가용 출근을 포기하면서 교통량이 줄었을 때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한산해진 거리와 파란 하늘을 만끽하면서 출근하는 여유를 부렸다. 물가가 오른 것 역시 참을 만했다. 금융시장이 요동을 칠 때도 낙관론을 폈다. 미국이 가닥을 잡으면 주가도 다시 오르고 환율도 제자리를 찾을 텐데. 부동산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지역 아파트값은 너무 많이 올랐으니까 적당히 빠진다 한들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쨌든 남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살아 움직이던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바닥’이라는 말도 있고,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말도 있다. 하루가 천년 같다. 한쪽에선 투자 손실을 본 고객들이 아우성이다. 펀드에 가입했다가 전 재산을 날렸다는 노인. 은행더러 책임지라는 아줌마. 속이 바짝 탄다. 전화 받기가 겁이 난다. 다른 쪽은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다. 밀린 신용카드 대금을 내려고 어디선가 돈을 마련해온 젊은 여성. 대출계 앞에 앉아 하소연하다가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 공장 문을 닫게 됐다는 거래처 사장. ‘압류만 해지해주시면…’ 하는 소리엔 고리대금업자가 된 기분이다.

왜 이런 일이 또 생기는 것인가. 파산, 압류, 경매, 그리고 벼랑 끝으로 몰린 사람들. 은행은 종일 북새통이다. 신문과 뉴스는 매일 난리법석이다. 노숙자 수가 사상 최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눈을 감으면 시커멓게 입을 벌린 터널이 보인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그동안의 몇 번의 금융 위기도 잘 버텨냈다. 그런데 이번 경기침체 위기의 메시지는 느낌이 매우 안 좋다. 그는 몇 번의 위기가 몰아쳤을 때도 낙관론자였다.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 씨는 은행과 대기업들이 줄줄이 망하는 틈바구니에서도 살아남았다. 일시적인 현상들이니까, 꿋꿋하게 버티면 원상 복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또한 쉽게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는 게 더 힘들어졌다. 은행은 걸핏하면 명예퇴직을 접수한다면서 행원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갔다. 기업체에 다니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구조조정당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면서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매달려 오늘까지 버텨왔다. 이제 혹한의 추위가 밀려오면서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도 그 어느 때보다도 춥게 느껴진다.

이 씨뿐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열심히 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런데 이게 정말 겨울일까. 때 이른 겨울로 보기에는 석연치가 않다.

지금까지의 위기들은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빠져나가곤 했다. 최근 우리가 직면한 경제 위기 역시 그랬다. 그런데 이번은 예전과 확연히 다르다. 지구가 한 바퀴 돌 때마다 각국에서 난리가 터진다. 혹한의 바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태평양을 거쳐 아시아로 오는 동안 거대한 세력으로 탈바꿈한다. 한파는 사람들의 돈과 희망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며 덩치를 키운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혹한과 눈보라가 다가온다. 이런 상황이 매일 반복되고, 국경을 초월한 공포에는 휴일도 없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무엇인가의 시작이다. 지금의 공포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변화의 시작’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앞으로 닥쳐올 변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어떻게 귀결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뿐이다.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과연 이 추위가 물러갈 것인지, 그래서 우리가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봄을 포기해야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위기의 ‘현상’만이 아니다. 그 위기 이면에 있는 본질적 변화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른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기업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제조업 공동화가 심해진다. 기업들은 웬만한 업무를 아웃소싱으로 돌린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양극화가 심화된다. 대기업은 더욱 강해지고 작은 기업들은 없어진다. 재래시장은 이미 사라졌다. 상인들은 대형 마트의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했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수입 구조는 심화된 양극화에 따라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 이 같은 현상들은 이미 구조화되어 단순한 경기지표 개선만으로 이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관점을 바꿔야 한다. 빙하기는 지금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다. 다만 몇 차례의 거품과 간빙기를 겪으며 우리가 착각했을 뿐이다. 다시 냉정하게 세상을 둘러보자. 빙하기 패러다임은 지금 어떤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TV 뉴스를 보는 것이 두려운 오늘, 세상에 몰아치는 혹한의 공포가 경제와 삶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바꾸어가고 있는지. 차분하게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추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시장 상인과 자영업자들이 몰락했다. 우리 이웃들이다. 모두가 ‘대기업 탓’이라고 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대기업 탓이 아니다. 우리들 때문이다. 대형 마트와 값비싼 커피 전문점을 선택한 것은 우리들이다. 자영업과 중산층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린다. 세련된 취향을 가진 우리들 때문이다. 

우리는 위로 오르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다. 그것도 남들보다 앞서 빠르게 오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어릴 때부터 주입받은 경쟁의식 때문이다.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전장구까지 팽개치면서 무게를 줄인다. 빠르게 오르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으니 속도가 조금만 느려져도 조급증에 빠진다. 기대 수준이 워낙 높아서 차근차근 오르는 것을 굼뜨다고 여긴다.

모든 산에는 꼭대기가 있는 것처럼, 고도성장 역시 언젠가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일정 규모에 이르면 성장(양)이 아닌, 성숙(질)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패러다임 바꾸기를 거부한 채 오로지 위로, 빠르게, 남들보다 앞서서 달려왔다. 앞만 보고 달렸다. 그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우리가 틀렸다. 성공에는 오르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 이면에는 무수한 내리막길과 교훈이 깔려 있었다. 생각해보면, 한동안 우리는 전성기의 로마인들만큼이나 잘난 척하면서 살았다. 선진국이 된 것으로 착각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빙하기, 지금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어쩌면 봄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의 따뜻했던 추억들을 가슴속에 묻어두어야 한다. 차라리 봄을 포기하자. 역설적이게도 희망은 포기로부터 시작한다. ‘조금 지나면 좋아질 것’이란 헛된 기대부터 버리자. 그리고 길을 찾아 나서자. 빙하기에도 살아갈 방법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지구상 생물의 90퍼센트 이상이 멸종하는 와중에도 의연하게 살아남아 오늘의 문명을 일구어냈다. 우리는 살아남는 데서만큼은 지구상 최고의 생명체다.

울타리를 믿지 마라
세계의 인재들과 국내에서 경쟁해야 하는 당신: 얼마 전 미국 <비즈니스위크>지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젊은 당신이 경쟁해야 할 상대는 주변 친구들이 아니라,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의 인재들이다.’ 이 기사는 생산기지 이전에 이어 사무직 분야의 각종 업무마저 매우 빠른 속도로 중국과 인도 같은 저임금 국가로 넘어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해외 아웃소싱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는 자기계발이 필요하며, 직업을 선택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전했다. 미국의 상당수 대기업들은 데이터센터와 콜센터를 인도로 옮긴 데 이어 재무, 회계, 인사 업무까지 아웃소싱으로 돌리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 각 대학에는 유학생들이 넘쳐난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지만 동유럽과 남미에서 오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들이 한국에서 공부를 마친 뒤 자기들 나라로 반드시 돌아간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국내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이들과 경쟁을 벌일 날이 머지않았다.
또한 국내 기업들도 일자리 상당 부분을 비정규직으로 돌리고 있다. 아웃소싱의 일종인 파견 형태 근무도 늘고 있다. 여기에 해외 아웃소싱까지 늘어난다고 생각해보자. 재무, 회계, 인사 업무가 모두 해외 아웃소싱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선진국 사례를 보면 소름이 오싹 돋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한다. 더 이상 안전지대는 없다고. 직장이 튼튼한 요새라고 생각해왔다면, 그래서 그동안 다소 안일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 바로 스스로에게 사과하자. 그것이 빙하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위대한 첫걸음이니까. 빙하기는 위기와 난국이 상존하고, 시련과 역경이 앞을 가리는 시기다. 빙하기를 건너는 가장 기본적인 지혜는 방향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다. 당황하지 말자.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두 눈을 들어볼 수만 있다면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변수와 복병을 즐거운 여행 동반자로 만들 수 있다.

남이 걸어간 길에서는 나를 위한 기회를 만날 수 없다. 그것은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가는 길에서는 도전의 즐거움도 야망의 꿈도 만날 수 없다. 우리는 모순을 발견할 것이다. 나 혼자라는 위태로움과, 나 혼자만의 길을 간다는 즐거움. 하지만 상상해보라. 이런 역설의 여정에서 인생 역전의 감동이 탄생하는 것이다.

2부 당신에게 절실한 ‘끊는 연습’

바로 지금 항복을 선언하라
어니스트 섀클턴은 지난 10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탐험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영국인이다. 1914년 8월, 섀클턴과 대원 27명은 세계 최초로 남극대륙 횡단에 나섰다. 그러나 6개월 후인 1915년 1월, 목적지를 불과 150킬로미터 앞두고 탐험은 실패로 돌아간다. 탐험선은 얼음덩이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게 되고, 탐험대는 숨통을 조이는 추위, 그리고 그보다 더욱 소름 끼치는 절망에 몸부림친다. 극지역의 겨울은 해가 뜨지 않는다. 그들은 칠흑 같은 겨울이 계속되는 기간, 얼음에 갇힌 배에서 열 달이나 버텼다. 

11월, 여름이 오자 얼음이 녹으며 부서진 배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탐험대는 살아남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섀클턴이 대원들에게 외쳤다.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만 빼고 모든 물건을 버려라! 각자 소지품은 일인당 2파운드(907그램)로 제한한다.” 대원들은 섀클턴의 명령에도 우왕좌왕했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포기하고 또 포기해도 2파운드 이내로 맞출 수 없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섀클턴이 품속에서 금으로 만든 담배 케이스를 꺼내 바닥으로 던졌다. 평소 섀클턴이 정말로 아끼던 것이었다. 

욕심에 졌음을 인정하라
사실 섀클턴이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은 금 담배 케이스가 아니라 탐험선 ‘인듀어런스 호(endurance; 인내)’였다. 탐험선 포기는 곧 항복 선언이었다. 자연의 강력한 저항에 완전히 패배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만일 섀클턴이 항복을 선언하지 않고 좌초한 배를 구하려고 매달렸다면, 그와 탐험대원 27명은 모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섀클턴 역시 갈등을 했을 것이다. 항복 선언은 자칫 희망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기 위해 항복하기로 결심했고, 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섀클턴의 항복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되새겨지는 위대한 결정으로 전해진다.

재난의 성격에 대해 우리는 빨리 정의를 내려야 한다. 지금 상태에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인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면, 우리는 속히 백기를 들어야 한다. 빨리 포기하지 않고 머뭇거리면 강력한 유혹이 다가온다. ‘버텨보지 그래? 조금만 버티면 끝날 것 같은데.’

그러나 우리는 위기가 금방 끝나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욕심 때문에 머뭇거리다가 악순환의 고리에 말려든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 바보라서 눈 뜨고 당하는 것이 아니다. 욕심과 집착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다. 사기인 줄 뻔히 알면서도 덫에 걸려 발을 빼지 못한다. 사람들은 위만 바라보고, 위를 향해 오르는 데 익숙해져 있다. 빨리 오르는 것이 성공이라고 믿는다. 어쩔 수 없이 내려가야 할 때가 있다고는, 상상도 하기 싫어한다.

오랫동안 성공을 지속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이 언제나 꼭대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르는 데도 익숙했지만, 내려가는데도 탁월했다. 내려가야 할 시기가 오면 두말없이 받아들이고 기꺼이 내려갔다. 남들보다 일찍 내려갔기 때문에 충분히 쉬고 다시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빨리 올라 정상에 도달했다.

맞설 수 없을 때는 빨리 포기해야 한다. 성공은, 역설적이게도 포기로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좋아하지만 잘할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과거부터 버려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섀클턴의 탐험선만큼이나 버리기 힘든 것이 있다.
바로 과거다. 과거가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추억은 마취제일 뿐이다. ‘왕년에’는 현실에 대한 관점을 왜곡시킨다. 마음속에 이상화시킨 과거를 현실과 비교한다. 그래서 언제나 과거는 선이고, 현실은 악이다. 하지만 과거를 찬양하며 현실에 불만을 토로해 봐야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더욱 멀어질 뿐이다.

우리는 과거부터 버려야 한다. 섀클턴이 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상을 향해 희망의 발걸음을 옮기던 기억을 놓아둔 채 내려가야 한다. 과거의 희망은 지금의 족쇄가 될 수도 있다. 목표가 바뀌었다. 과거에는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안전하고 빠르게 산 밑에 도착하는 것이다. 행복한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우선 생존 자체를 확보해야 한다. 생존 없는 생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절망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처절하면서도 간절한 노력이 지금 여기서 바로 이루어질 때다.

고성장 시절에 대한 미련을 버려라: 80~90년대 한국은 마치 지금의 중국 같았다.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한 해가 네 차례나 있었다. 일부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제외하고는 대개 6~9퍼센트대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최근 2023년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2.1퍼센트에서 1.7퍼센트로 낮췄다. 

고성장 시절은 당연히 지금 같지 않았다. 주식 시장이 활황을 보였고, 건설 경기가 좋을 때면 돈이 많이 풀려 영세 상인들에게까지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옛날을 예찬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개 이 시기와 현재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과거는 되풀이되는 일이 없다. 따라서 고도성장 시절의 추억은 역사에 넘겨주고, 우리는 눈앞의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경제 빙하기에 접어든 지금, 고도성장 시절의 영광에 젖는 것은 히말라야 산등성이에서 선 채로 잠이 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꿈속에서 옛 기억을 더듬는 사이, 저체온증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우리들을 위협으로 내몬다. 그러니 미련을 버리고 깨어 있자.

프로처럼 단순하고 부드럽게
업(業)의 시대, 프로페셔널의 시대: 현재 펼쳐지고 있는 직업세계의 변화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직(職)’의 시대가 가고, ‘업(業)’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직의 시대였다. ‘무엇’이 되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전문직이 되면 고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회사원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직은 한마디로 자리에 목숨을 거는 성공의 척도였다. 이른바 명함이다. 좋은 직을 가지고 나면 특별한 잘못이 없는 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직의 시대에는 전문가가 최고 대우를 받았다. ‘전문가와 비전문가’로 대별되던 시기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 전문직이 넘쳐난다. 시장 개방이 이뤄지면 외국의 전문직들과도 경쟁을 벌여야 한다. 회사원도 다를 바 없다. 일찍 승진한다고 좋을 것이 없다. 아무리 좋은 명함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것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제는 업(業)의 시대다. 업의 시대에는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라는 구분법이 적용된다. 전문직이든 회사원이든 전문성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전문성(지식)이 첫 번째 능력 판별 기준이 아니다. 지식은 인터넷에도 넘쳐난다. 업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프로페셔널이 되어야 한다. 프로페셔널의 출발점은 ‘고객의 바람을 이루어준다’는 열망이다. 전문직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프로로서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프로가 되지 못한 변호사나 의사는 간판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프로는 고객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고객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고, 고객과 함께 해결책을 논의한다. 고객의 고통이나 불편을 줄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직(職) 수준의 사람은 아마추어다. 아마추어는 ‘자리’에 목숨을 건다. 반대로 업(業) 수준의 프로페셔널은 ‘의미’에 목숨을 건다. 아마추어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다그친다. 그러나 프로는 자신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아마추어는 이기는 것 자체를 즐긴다. 아마추어의 경쟁상대는 언제나 밖에 있는 다른 사람이다. 반면 프로의 경쟁 상대는 어제의 나다. 그래서 프로는 남보다 잘하기보다 전보다 잘하려고 노력한다.

직(職) 수준의 사람은 주로 ‘원(員)’으로 끝나는 직업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회사원(會社員), 공무원(公務員), 종업원(從業員), 미화원(美化員), 경비원(警備員), 특파원(特派員), 상담원(相談員), 판매원(販愛員), 승무원(乘務員), 은행원(銀行員), 교환원(交換員), 집배원(集配員)과 같은 직업이다. 이들은 언제나 남의 집으로 출근하는 사람으로, 조직의 일원이 된 사람들이다. 인공지능으로 쉽게 대체가능한 직업군에 속한다. 하던 일을 반복하는 매뉴얼 중심적인 사람들이다.

반면에 ‘가(家)’로 끝나는 직업을 가진 사람, 즉 ‘업(業)’의 사람들도 있다. 소설가(小說家), 사상가, 연출가, 비평가, 작곡가, 예술가, 성악가, 조각가, 건축가, 미식가, 탐험가, 여행가, 역사가, 만화가, 무용가, 연설가, 서도가 같은 직업이다. 이들은 원으로 끝나는 직업과는 다르게 자기 집이 있는 사람이다. 즉 어떤 조직에 소속되어 일원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이다. 이들은 경제 빙하기가 와도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만의 고유한 노하우나 자기 색깔로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꾸는 사람들이다.

목표에 목숨 걸다 목숨이 끊어진다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는 불교용어가 있다. 일상에서 차나 식사를 하는 평범하고 소소한 일, 그 속에 깨달음의 정수가 들어 있다는 의미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한 말처럼, 결정적인 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다. 다반사가 매 순간 펼쳐지면서 사람은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산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사람은 누구도 자신에게 남은 세월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다.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두 번은 없다’라는 시에서 힘주어 말한 것처럼,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모든 순간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절체절명의 소중한 시간이다. 매번 다른 한순간이 모여서 한평생을 만들어간다. 

다반사와 시한부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중한 미덕이 무불경(母不敬)이다. 무불경은 《예기》에 나오는 말로, ‘매사에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는 뜻이다. 일상다반사에서 만나는 모든 순간과 사물, 사람과 환경과의 만남은 경이로운 기적이 탄생하는 깨달음의 무대다. 생명체는 물론 모든 비생명체도 저마다의 이유와 방식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주어진 삶을 담담하게 감당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 중 하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직선주로를 전속력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목표를 달성하는 여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마주침을 귀히 여기기보다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느끼는 만족감이나 성취감 중심으로 살기 때문이다.

지금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질주야말로 목숨까지 앗아가는 원흉이 된다. 목표 자체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목표를 행복을 가져다주는 소중한 디딤돌로 생각하지 않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목표 달성 자체만을 강조하고 그 결과에 몰두하다 보니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우연한 마주침이나 부산물의 소중한 의미를 간과해버린다.

목표를 달성하는 일 말고도 일상다반사는 엄청 많다. 하루를 무불경의 자세로 살아가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게 경이로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다 결정적으로 의미심장한 순간이다. 모든 순간은 반복할 수도 없고 공통점도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목표 달성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다: 목표 달성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숙제가 아니다. 오히려 목표 달성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몰입해서 즐기는 축제와도 같다. 목표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시적 결과물로 생각하는 순간,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보다 결과에 치중하게 된다. 자신을 어제와 다르게 탈바꿈시키기 위한 도전 과제가 아니라 일정한 시점에서 반드시 달성해서 보여주어야 하는 노동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목표는 불행을 초래한다.

목표는 보여주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목표 달성은 나의 존재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행복’의 원천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지금 그 일을 하는 과정에 애정과 관심이 없는 사람이 결과중심으로 일을 하면 쉽게 지치고 중도에 포기하거나 사는 것 자체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도전하면서 그 일을 즐기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서 생기는 부산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높일 수 있다. 목표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목표 이외의 모든 것을 목표 달성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여긴다. 반면 목표 달성 과정을 즐기는 사람에게 목표라는 결과물은 또 다른 목적지로 출발하기 위한 중간 거점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은 목표 달성을 위해 전속력으로 올라가는 기술이 아니라,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더 원대하고 심장 뛰는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내려가는 기술이다. 잘 내려가지 못하면 다시 올라갈 수도 없다. 올라가는 속도보다 내려가는 밀도가 행복감과 직결되어 있다. 내려가는 연습은 지금까지 배운 게 더 이상 통용되지 않으니 새로운 생각(rethinking)과 새로운 기술(reskill)로 무장하는 연습이다. 종전과 동일한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기술은 더 이상 시장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지금은 얼마나 빨리 올라가서 목표를 달성하느냐보다 얼마나 더 오랫동안 힘든 상황을 이겨내면서 다시 올라갈 힘을 바닥에서 기르느냐가 중요하다. 설혹 달성하지 못한 목표가 있다 할지라도 힘을 빼고 바닥으로 내려가 상황 변화에 내 몸을 적응하는 느린 기다림이 필요한 시기다. 지금은 속도의 끝에서 밀도로 무장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시점이다.

3부 낮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자

항상 최악을 상상하라
조개는 살아남기 위해 진주를 만들어낸다. 진주는 외부로부터의 위기로 생성된다. 조개가 입을 벌리고 활동할 때 왕모래 같은 이물질이 들어온다. 조개는 분비물을 내뿜어 이물질을 감싸기 시작한다. 이물질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자꾸 감싸는 것이다. 이것이 진주가 된다. 진주는 살아남기 위한 조개의 몸부림인 셈이다. 조개가 입을 벌리고 있다가 난데없는 침입자를 맞이한 것은 분명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조개는 그런 순간을 받아들이고 품어내어 마침내 자신보다 더욱 아름다운 진주를 창조해낸다. 자신의 고통을 ‘~때문’이라면서 탓하지 않고, 오히려 ‘~덕분’이라며 진주를 키워내는 셈이다. 고통을 ‘~덕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된 자세다.

성장은 완성된 목표를 향한 일사불란한 행진곡을 지향한다. 성장은 양적 발전을 추구한다. 당연히 속도를 중시한다. 반면 성숙은 미완성 교향곡이나 변주곡을 지향한다. 성숙은 질적 반전을 추구한다. 당연히 모든 순간의 밀도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성장은 계획 대비 목표 달성과 실적에 초점을 맞춘다. 이에 비해 성숙은 실적보다는 목적지에 이르는 여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 과정에서 보고 느끼는 깨달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성숙이 더욱 의미 있는 성장을 부른다. 성숙한 사람은 예기치 않은 변화에 휘둘리지 않으며 이익의 탈을 쓴 위험을 분간해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무한 성장을 잠시 멈추고 내면적 성숙을 기할 때다. 성숙을 통해 성장도 의미 변화를 겪는다. 무엇이 성장이고 왜 성장하려고 하는지를 근본적으로 물어보기 때문이다. 성숙한 사람들은 어떤 사태든 만만하게 보지 않는다. 

빙하기는 역전 찬스다
씨름에서 안정적인 자세를 갖추려면 몸을 낮춰야 한다. 일어설수록 상대방 공격에 균형을 잃기 십상이다. 승부는 순식간이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자세를 낮추고 고개를 숙인다. 무능은 겸손이 아니다. 실력 있는 사람만이 겸손할 자격을 얻는다. 겸손은 땅에서 멀어질수록 없어진다. 자세를 낮추는 것은 비굴이 아니다. 그것은 내려갈 수 있는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솟구쳐오를 무한한 가능성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

바닥은 신념이다. 바닥에 도달하면 신념이 바뀐다. 그리고 사람이 변한다. 겸손한 ‘낮음의 미학’이 거들먹거리는 ‘높음의 어리석음’을 무너뜨린다. 바닥을 찍은 사람만이 흐름을 타면서도 자기중심을 잡을 수 있다.
 
내려가는 행복과 명품인생: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현재 직업은 ‘목수’다. 고향인 조지아 주의 작은 마을에 목공 제작실을 차려놓고 가구를 만든다. 전직 미국 대통령이 만든 가구는 경매에서 매우 높은 가격에 팔리고, 그가 가구를 팔아 거둔 수익금은 모두 자선재단에 들어간다. 재단은 아프리카를 돕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인다. 카터는 “지금이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대통령 시절에는 누리지 못했던 소박한 즐거움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카터의 시골 마을 생활이 처음부터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선거에서 레이건에게 참패한 그가 백악관을 떠나 그곳으로 내려간 것은 1981년 1월이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20세기 최악의 대통령’으로 지미 카터를 꼽는다. 대통령에서 물러날 당시 그의 지지율은 약 13퍼센트였다. 대통령학 연구자 네이슨 밀러는 그의 저서 《미국 최악의 대통령 10인》에서 지미 카터를 1위로 꼽았다. 지미 카터가 ‘노(no) 비전의 대표 주자’였으며 ‘애매모호의 화신’이었다는 것이다.

고향으로 내려간 카터는 재정적으로도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땅콩농장을 팔아 맡겨둔 투자에서도 100만 달러 이상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대통령직에서 내려왔으니, 다른 곳으로 올라가야 할 차례였다.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 오히려 더 큰 찬사와 존경을 받아왔다. 카터센터를 만들어 인권 증진 활동을 벌였다. 아프리카의 전염병 퇴치를 위해서도 뛰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운동에도 참여해 집짓기 봉사활동을 했다. 분쟁지역을 찾아 나서 평화활동을 지원했다. 1994년에는 한반도 위기가 전쟁 발발 직전까지 치닫자, 남한의 김영삼 대통령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각각 만나 평화 무드를 이끌어냈다. 그 노력을 인정받아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카터는 ‘가장 형편없는 대통령’으로 자리에서 내려왔다. 아무도 박수를 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성공한 전직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디딤돌 삼아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 올라간 것이다. 카터에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것은 그가 ‘받아들이는 지혜’를 터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슬프고 노여운 일들이 잔혹한 얼굴을 들이밀 때마다 거부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수용하고 기꺼이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서도 행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려가야 한다는 것은, 그동안 높은 곳에 있었다는 것이니, 그것 또한 행복한 게 아니냐는 달관의 깨달음은 편하게 다시 오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흥겨운 노래를 부르면서 리듬에 맞추어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는 것이다.

2023년 현재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가장 장수하고 있는 지미 카터(98) 전 대통령은 최근 병원 치료를 중단하고 남은 시간을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며 호스피스 돌봄을 받기로 했다고 한다. 인생의 마지막을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행복하게 살아온 지난 생을 회고하며 반추할 때 인생의 마지막은 더없이 소중한 순간으로 간직될 것이다.

내려가는 것, 그것은 패배해서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속의 심연을 찾아서 떠나는 새로운 출발이자 여행이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걸음이 아니다. 욕심과 공포, 질투, 집착 같은 과거를 비우는 걸음이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려갈 때마다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이제는 내려가는 것이 행복하다. 내려가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느끼고, 흐름에 맞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다시 오를 것이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려가자.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자. 그리고 희망을 나누자. 우리는 사랑해야 버텨낼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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